리즈 시절의 주인공. 리즈 유나이티드가 EPL로 복귀를 확정지었다.
오리지널 장미의 전쟁으로 불리는 리즈와 맨유의 더비를 차치하고라도 리즈와 첼시의 라이벌 관계 또한 꽤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 좋은 성적을 내던 양팀은 1970년 FA컵 결승전으로 라이벌 관계를 공고히 하게된다.
첼시와 리즈는 1970년 4월 11일 웸블리에서 열린 FA컵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1967년 FA컵 준결승에서 첼시에 패한 리즈는 복수를 벼르고 있었다. 리즈의 선제골과 첼시의 동점골로 전반전을 1:1로 마친 리즈는 종료 6분전 추가골을 넣으며 우승하는 듯 했지만 바로 2분뒤 첼시의 스트라이커 이안 허친슨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연장전 끝에 무승부로 재경기를 하게된다. 4월 29일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FA컵 결승 재경기는 2800만명의 시청자로 영국 TV 프로그램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 중의 하나로 기록 되었으며 역대 축구 경기 중 가장 더러운 경기 중 하나로도 손꼽히고 있다.
재경기에서 역시 리즈는 선제골로 우승하는 듯 했으나 후반 78분 피터오스굿의 동점 다이빙 헤딩슛이 터지며 피터오스굿은 FA컵 모든 라운드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로 FA컵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결국 연장 104분 첼시의 데이비드 웹이 이안 허친슨의 롱드로잉을 헤딩 결승골로 연결하며 첼시는 리즈를 누르고 첫 FA컵 트로피를 들게된다.
어쨌거나 이 경기는 FA컵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경기 중 하나이자 축구 경기 역사상 가장 더티한 경기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첼시의 주장 론 헤리스는 이전 경기의 MOM 에디 그레이를 끊임없이 거친 파울로 밀착 마크하며 무력화 시켰고, 리즈의 찰튼은 무릎과 박치기로 오스굿을 타격했으며 헌터와 허친슨은 펀치를 주고 받기도 했다. 선수들은 필드에서 나뒹굴었고 양팀의 명백해 보이는 파울들이 계속 이어졌지만 심판의 제지는 없었다. 첼시의 에디 매크레디는 리즈의 빌리 브렘너를 태권도킥으로 납작하게 만들었다. 첼시의 골키퍼 피터 보네티는 존스에 의해 골대 안으로 쳐박힌 후 붕대를 두툼하게 감은 무릎으로 절뚝거리면서도 결정적인 선방들로 우승의 한 축을 담당했다. 2년뒤 1972년 FA컵 결승에서 리즈 팬들이 ‘노만은 당신의 다리를 문다’ 라는 악명 높은 배너를 자랑스럽게 걸기까지한 리즈의 핵심 수비스 노만 헌터도 이 전설적인 경기의 명성을 높이는데 한 몫을 했다.
1997년 심판 데이비드 엘러레이는 이 올드매치를 보면서 현재라면 6장의 레드카드와 20장의 옐로카드 이슈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릭 제닝스 심판은 두 경기에 걸쳐 허친슨에게 단 한장의 옐로카드만 주었을 뿐이였다. 후일 휴 맥일번니는 "제닝스 심판은 사망진단서가 나와야 프리킥을 선언할 것으로 보였다"고 회고했다. 웹 또한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면 당연히 경고가 나오겠군 했는데,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풀며 ‘서둘러. 알았지?’ 라고 말할 뿐이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두 팀의 적대감은 심해졌으며 더 타임즈의 제프리 그린은 1971년 12월 스탬포드 브리지의 0-0 무승부를 경기를 보고 "축구라기보다는 마피아 복수를 더 닮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72-73시즌 개막전에서 첼시가 리즈를 상대로 4-0으로 승리한 이 경기는 리즈의 트레버 체리, 테리 요라스와 첼시의 크리스 갈랜드가 경고를 받았고 리즈는 데이비드 하비와 믹 존스를 부상으로 잃었다.
이후 첼시는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테라스 주변에 철조망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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